1년에 학교에는 몇건의 공문이 접수되고 생산됐을까? 지난해 12월 31일부로 학교 문서 등록 대장에는 1만2,449건의 공문이 등재됐다.

교육부나 타 기관의 협조 사항과 각종 행사의 신청 등 협조 게시공문은 2,958건이 된다.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처리해야 할 공문의 양이 190일의 수업일수로 계산해보면, 하루에 80건의 공문이 처리된다. 교무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교감은 부장들과 함께 하루 80건의 공문을 처리해야 한다.

특히, 학교는 청와대에서부터 지자체까지 모든 기관에서 많은 협조 요구를 받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것이 주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돼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각종 코로나 지원서비스를 학생들을 통해 가정으로 전달됐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더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진보교육이후 지역공동체속의 학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지만, 주변에서는 학교의 모든 자원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다.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에 왜 이렇게 많은 공문이 필요할까? 해방이후 자생적 근대학교가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예산을 쥐고 있는, 행정 관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의 군사통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게 됐다.

학교의 본질이 교육과정 운영에 있음에도, 그 본질은 늘 외면돼 왔다. 교육부에서부터 산하단체, 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육행정 관료에 의해 장악되었고, 덩달아서 교육 본질 영역인 교육과정 영역도, 효율성의 핑계로,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모든 학교를 장악하게 됐다. 지원영역이 본말이 전도되어, 주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실태는 교육부 조직이나 교육청, 산하단체의 조직에 소위 현장 교사 출신이 얼마나 배치되어 있는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교육행정 관료들은 교육의 본질이 행정에 의해서 구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교육행정을 중심으로 승진체계나 관리체계가 만들어진 현장에서는 당연히 공문이 왕도일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시와 운영은 공문에 근거하고, 공문에 없는 내용은 일단 중요도에서 밀려난다. 공문의 내용이 학교장이나 교사의 판단 위에 있고, 공문에 없으면 교육도 없다. 교육과정은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자율성을 가져야, 학생 성장에 따른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다.

공무원이 법과 규정을 지키는 것은 기본 덕목이지만, 교육의 영역에서도 법과 규정으로 다 통제가 가능하고,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이 신화는 학교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이식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자율성이 동력을 갖지 못하는 체제에서는 당연히 통제의 메커니즘이 주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10년 전부터 궁여지책으로 교감을 팀장으로 별도의 전담팀을 조직하여 공문을 처리하고, 교사들에게 행정업무를 부여하지 않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수업을 해야 할 교사들의 수업시수를 줄여서 공문 처리를 하는 이 구조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교육부 차원에서 학교의 행정업무를 줄이고, 행정인력을 보강해, 교사를 학생들에게 돌려줘야만 교육과정 중심의 학교가 탄생할 수 있다.

최근에는 교육청과 학교 차원에서 각종 공문을 필터링 해 각종 행정업무가 교실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공문을 간소화하고 효율화하고 있지만, 시의회나 교육부, 감사기관, 국가기관의 행정 체제는 과거의 관행대로 학교를 대하고 있어, 여전히 지시 점검의 기제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학생, 교직원, 학부모의 자율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학교 자치라는 큰 틀을 가지고, 강력하게 독려하고 있지만,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이양하지 않는 한 진정한 효과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공문 주의는 상당히 오랫동안 학교문화에 타성을 심어 놓았고, 교육과정은 입시 체제에 의해 획일화를 강제당해 왔다.

가장 강력하면서도 오래갈 통제는 자율성의 힘이다. 공문 주의를 벗어나 자율성을 구축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는 개학 날 아침이다.

광주양산초등학교 교감 이재남